조선
남원성을 지키기 위한 준비
정유재란시 남원성의 수비는 구원군으로 왔던 양원의 군대에 의해서 전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양원은 5월 21일 서울을 떠나 전주를 거쳐서 6월 13일 남원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양원은 남원성 내에 있는 용성관에 남원성을 지키기 위한 작전 본부를 설치하였다. 이보다 앞서 전주에 도착한 양원은 순찰사에게 모든 읍에 있던 군졸과 군마를 남원성으로 모이게 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이것이 남원성 수비를 위한 양원의 첫 조치였다. 양원이 남원에 도착한 뒤에는 지금까지의 남원성을 지키려는 계획과는 상당히 달라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 구원군이 오기 전에 조선측에서는 남원성을 방치하면서까지 산성의 방어 계획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구원군이 도착한 후 양원이 조선군과 명나라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하게 되면서부터 산성의 수호계획을 파기하고 남원부성의 수호 계획만을 일방적으로 결정 해버린 것이다.
남원성을 침략한 왜군의 병력
남원성 싸움에 참여한 왜군의 병력은 육군의 좌군 수군으로 총 56,800명이 된다. 이러한 숫자는 조선관군과 명나라 군대의 4,300 - 4,400여명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엄청난 차이가 있음 을 알 수 있다. 무기면에서 왜군이 남원성 싸움에 사용한 종류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조총이 주목할만한 것이었다. 이에 비하여 조선 관군과 명나라 군대는 곤봉·활·칼·창으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개인 장비면에서 왜군이 훨씬 앞선 당시로는 최신예무기를 소유하였다.
남원성 싸움의 끝남
남원성의 함락으로 충청도와 전라도가 붕괴되었고 서울까지 민심이 동요되어 세자와 중전이 피난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와 같이 남원성 싸움은 남원 지방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조선 전체가 붕괴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매우 중요한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