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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의 길잡이 / 남원명인명창 /

국악의성지에 모셔진 명인/명창

명인 옥 보 고

옥 보 고(玉寶高)( ? ~ ? )
백제 때부터 통일 신라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예술인들이 기라성처럼 남원 으로 모여 들었다.
통일신라 때 옥보고는 거문고를 가지고 운상원(운봉)에서 50년이나 제자를 가르쳤다고 한다.
<삼국사기> 악지편에 보면, 옥보고는 경덕왕 때(742-764) 신라인 사찬(신라 17관등중 8번째 관등)이었던 공영의 아들로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 가서 50년동안 거문고를 읽히고 새로운 악조 30곡을 작곡하였다고 한다. 옥보고는 그의 금도(琴道)를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고 속명득은 그것을 귀금(貴金)에게 전하였는데 귀금도 지리산에서 거문고를 익혔다.

신라의 왕은 거문고의 전통을 잇기 위해 이찬(이찬, 신라17관등 중 2번째 관등) 윤흥(允興)에게 방편으로 속명득의 음악을 전승하도록 명하고 남원 지역의 공사를 맡겼다. 윤흥은 남원 관청에 이르러 총명한 두 소년을 뽑았으니 그들은 안장(安長)과 청장(淸長) 이었다. 그들로 하여금 거문고의 전통을 배워서 전승토록 했으나 귀금은 거문고의 은미한 연주기법을 그들에게 전수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윤흥은 그의 부인과 함께 귀금을 찾아가 여쭙기를 우리 임금님이 저희를 남원에 파견한 것은 선생의 기법을 전수하고자 함이나 3년이 지나도록 비법을 전승시키지 않으니 저희들은 임금님께 복명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고서 윤흥은 술병을 들고 그의 부인은 술잔을 들어 무릎을 꿇고 극진히 귀금에게 예의와 정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에게 비전하는 표풍곡(飄風曲) 등 3악곡을 전승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장은 그의 아들 극동(克桐)과 극종(克宗)에게 전승 시켰는데 극종은 7곡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옥보고가 작곡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 30곡은 다음과 같다. 상원곡 1곡, 중원곡 1곡, 하원곡 1곡, 남해곡 2곡, 기암곡 1곡, 노인곡 7곡, 죽암곡 2곡, 현합곡 1곡, 춘조곡 1곡, 추석곡 1곡, 오사식곡 1곡, 원앙곡 1곡, 원첩곡 6곡, 비목곡 1곡, 입실상곡 1곡, 유곡청성곡 1곡, 강천성곡 1곡이다.

명창 송 흥 록

송흥록(宋興祿)은 (1780년경) 전북 남원시 운봉읍 비전마을에서 태어났다. 송흥록은 어릴 때부터 나이에 비하여 기골이 장대하였고, 재주와 슬기가 출중하였으며 풍채 또한 빼어났다. 송흥록은 6세 때 서당에 다니면서 글공부를 시작하였고, 집으로 돌아오면 부친 송첨지에게 춘향가를 배웠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헤아려 아는 그 재주에 서당훈장은 감탄하고, [네가 양가에 태어났더라면 장차 큰 인물이 될 터인데 안타까운 일이다]하고, 탄식하였다고 힌다. 송흥록은 소리공부에 있어서도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나서, 그 성음이 극히 청미한데다가 성량이 또한 풍부하였고 부친이 한두번 선창하면 그대로 방창하였다. 그래서 서당에서는 [신동]이라 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일러 [가무보살(歌舞菩薩)의 시현(示現)이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송흥록의 부친 송첨지는 원래 초대 명창 권삼득의 수행고수로서 권삼득과 여러 해동안 기거를 같이하여 왔기 때문에, 권삼득의 소리바디와 너늠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송첨지는 송흥록에게 기대를 걸고 어려서부터 정성껏 소리를 가르쳐 왔던 것이다. 송흥록은 12세 때 백운산으로 들어갔다. 백운산 일대에는 유명한 고찰과 암자가 많았다. 송흥록은 백운산 깊은 곳에 자리한 암자에 거처하는 월광선사(月光禪師)의 도움을 받아 아무 걱정 없이 소리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밥만 먹으면 소리를 계속하였고 밤이면 월광선사에게 글을 배웠다. 송흥록은 입산한 지 5년만에 소리가 무엇인지 터득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월광선사는 말하였다. [이제 글은 내게서 더 배울것이 없다. 소리의 원리에 대하여 설명할 것이니 명심하고 듣거라]하고, 다음과 같이 설파 하였다.

[네가 부르는 소리, 즉 창은 우주의 삼라만상의 소리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중생의 희노애락과 애오욕과 생로병사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천파만류의 물이 흘러서 바다에 이르면, 오직 한맛으로 변하는 바닷물이 되는 이치이며 소리 또한 그러함이라. 다시말하면, 만백성의 우주에 충만한 한소리한소리가 합쳐져서 원음인 한맛의 소리가 극치에 이름이라. 그러므로 이 세상 만물의 소리는 너의 연구대상이니 결코 듣고 흘려 버리지 말지니라] 또, 월광선사는 창법의 원리에 대하여 [말과 음의 조화를 이루는 어단성장(語短聲長)의 창법을 알아야 하고 귀성이 낀 소리, 맵시 있는 너름새, 오음과 음향을 명확하게 분별하는 이른바 득음(得音)을 완전히 구사하며, 사설의 발음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연마하되 소리 밖에 소리가 있고 장단 밖에 장단이 있으니, 그 도리를 께달아야 할 것이니라. 그리고 네가 지금 부르는 사설이 너무 조잡하니 가사를 정리하고 이를 집대성하여라] 하였다. 송흥록은 크게 깨우친 바 있어 이때부터 가사를 정리하기 시작 하였다. 먼저 춘향가에 있어서 불합리하고 조화가 이뤄지지 않은 대목은 다시 가다듬고, 너무 잡희에 지나친 곳은 고쳐가며,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음악적 기교와 정감에 알맞도록 창곡을 근간으로 하여 수정하였다. 사설에 있어서도 거기에 다시 예로부터 전하여 오는 민속적 사설과 한시부의 단편을 삽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시창, 가곡, 단가, 농요 등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조잡하고 짜임새 없는 내용은 수정삭제하며 잡희의 구사경지를 완전히 탈피하여 발림, 좌립진퇴, 표현기교의 완전한 극적효과를 나타내는 극창으로서의 춘향가와 흥보가를 완성하였으며, 당시의 고전에서 별주부전, 변강쇠타령, 적벽가 등을 정리하고 이를 집대성 한 것이다.

이러한 연구노력과 적공이 쌓이고 쌓여서 송흥록은 10년만에 득음대성하였다. 그리하여 얻은 목은 마치 하늘을 뚫을 듯하였고, 광활한 지역을 울려 덮을 듯하였다. 그 웅장하고 쾌활한 성량은 과연 신비한 영역에 도달하였다. 이와 같은 지신(至神)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송흥록이 10년을 하루같이 불철주야 심혈을 다하여 절차탁마(切磋琢磨)한 적공이었으며, 또한 월광선사의 보살핌과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월광선사는, [이제 너의 소리는 신역에 이르렀다. 네가 세상에 나가면 불세출의 명창이 되리라. 이제 그만 세상으로 돌아가라]하며 다시 당부하기를, [너는 여난의 상이 있으니, 세상에 나가거든 각별히 여색을 조심하여라] 하였다. 이리하여 송흥록이 하산하려던 그 전날 밤의 일이었다. 삼경에 초립동(草笠童) 세 사람이 찾아와서, [영상대감께서 부르시니 지체말고 어서 갑시다.]라고 하여 송흥록은, [어느 영이라고 거역하겠오마는 이꼴을 하고야 어찌 가겠오?]하니 초립동은, [의관일습은 다 마련되어 있으니 염려말고 어서 가기나 합시다.] 하여, 송흥록은 입은 옷 그대로 아무런 의심없이 초립동을 따라 나섰다. 휘황하게 밝은 보름달밤 북쪽으로 능선을 타고 얼마나 갔을까, 멀리 산아래 기슭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당도하였다. 초립동 한사람이 문간방 방문을 열고, [ 이 방에 의관일습이 있으니 갈아입고 나오시오]하였다. 송흥록이 방으로 들어가 보니, 과연 초립동의 말대로 의관일습이 놓여 있었다. 송흥록은 헌누더기를 벗고 비단 바지저고리에 버선 행전이며 초록색 도복에다 통영갓에 호박풍잠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안체로 인도되었다. 육간대청 너른 마루에 삼정승 육판서와 만조백관이 금관조복 차림으로 좌정하였고, 수십개의 촛불이 휘황찬란하게 대낮같이 밝혀 있었다, 상좌의 영의정이 말하기를, [네가 비곡(悲曲)을 잘 부른다 하니, 옥중가를 들어보자] 하였다. 원래 춘향가 중의 옥중가는 옥중비가라고도 하며, 춘향가 전편을 통하여 가장 비통한 대목이다. 애지중지하던 임을 이별하고 주야상사 슬피울며 세월을 보내던 춘향이는 신관사또의 수청들라는 성화에 저사모피하다가, 끝내는 삽십 대 형정맞고 옥에 갇혀 신음하면서 그래도 이몽룡을 이틋이 그리워하는 슬픈노래인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대관들 앞에 나서고 보니 송흥록은 떨리기도 학였으나 흥분과 긴장을 가라앉히고 목을 가다듬고 옥중가를 시작하였다. 애원한성으로 엮어나가는 송흥록의 비사애조에 청중은 측은한 표정으로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이윽고 송흥록의 소리가 끝나자 영의정은 옷소매로 눈물을 딱고 말한다. [과시 천하의 명창이다. 그러나 귀곡성이 미진하구나. 내가 귀곡성을 가르쳐 줄 터이니 따라 배우라] 귀곡성(鬼哭聲)이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흉내내기 어려운 귀신의 울음소리를 말한다. 영의정이 귀신의 울음소리를 하는데 송흥록은 몸이 오싹하면서 소름이 쭉 끼쳤다. [옳지! 이것이야말로 정말 귀곡성이다.] 송흥록은 탄복하면서 따라 불렀다.

송흥록은 타고난 천재인지라 영의정의 귀곡성을 그대로 방창하여 완전히 배워 익혔다. 그날밤 송흥록은 분명히 산해진미의 대접을 받았고, 비단금침 속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보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고래등같은 기와집과 삼정승 육판서는 간곳이 없고, 황량한 벌판에 다 허무러진 어떤 망령(亡靈)의 옛무덤 속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송흥록은 오싹 소름이 끼치면서 어찌나 무서웠든지 벌떡 일어나서 혼비백산하여 앞만 바라보며 오금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나, 육십령 - 백운산과 덕유산의 중간지점으로,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를 짓는 소백산맥의 험한재까지 도망쳤는데, 거기서 초부에게 물어물어서 그 암자까지 돌아오는데 3일이 걸렸다고 전하고 있다. 그거야 어찌 되었든간에 송흥록이 세상으로 나오자마자 그의 명성은 금방 삼남일대에 자자하였다. 어느날 진주 관찰사(觀察使)의 부름을 받고, 그날밤 진주의 촉석루에서 옥중비가를 불렀을 때 수천의 청중은 송흥록의 슬픈소리에 모두 눈물을 흘렸고 귀곡성을 내는 대목에 이르러 창거창래(唱去唱來)의 진경에 들어가자 갑자기 귀신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청중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로 전한다. 어찌하였던 송흥록처럼 많은 전설과 신화(神話)를 남긴 명창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송흥록은 무슨 소리고 그저 듣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새, 달리는 짐승의 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우짖는 바람, 졸졸 흐르는 물소리까지도 무심히 듣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의 모든 소리라 하는 것은 무슨 소리이건 다 송흥록에게는 좋은 교재요 연구의 대상이 아닌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한 마리 황소의 기운찬 울음소리를 듣고 [얼씨구! 소리는 저렇게 힘차고 무게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은 그것을 잘 증명하고 남음 이거니와, 이것은 또 송흥록만의 깨달음이며 터득인 것이다. 이는 물론 월광선사의 가르침을 받은 영향도 있겠지만, 그러한 공부가 소리를 지르면 성낸 바람과 같이 나무라도 부러뜨리고, 속삭이듯 소리를 낮추면 따스한 봄바람에 꽃을 피우는 불세출의 절창(絶唱)을 낳았다. 사람마다 높은 목이 힘 안 들이면 눅은 청이 어렵고, 눅은 목이 부드러우면 높은 목이 안타까이 달린다. 즐거운 소리가 능하면 슬픈 곡조가 미치지 못하고, 한스러운 창이 미끄러우면 기꺼운 사설은 좀 부끄러운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송흥록은 어느 소리고 목에 걸려서 어렵거나 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상성, 중성, 하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귀신에게 배웠다는 귀곡성은 탈조화(奪造化)하였다고 한다. 대낮에 들어도 머리끝이 쭈빗할텐데 궂은비 오는 어두운 밤에야 귀신의 울음소리는 정말 무서웠으리라.

송흥록을 평하여, [모든 가사를 집대성한 공로와 기량의 특출한 점으로 보아서 판소리의 중시조라 할 수 있으며, 그의 고매한 인격과 기예의 절륜, 포부의 호대함은 뒷사람이 도저히 미치지 못할 바라]고 하였다. 이것은 후일의 이야기이지만 명창으로서 헌종의 총애를 받았던 모흥갑은 송흥록을 가왕(歌王)으로 떠받치고 스스로 물러간 것만 보더라도 송흥록의 소리와 격조를 헤아리기에 부족은 없을 것이다. 송흥록은 대구감영의 부름을 받고 선화당에서 옥중비가를 불렀다. 그시기 경상감사의 수청기생 맹열은 송흥록의 선풍도골과 소리에 황홀하여 넋을 잃고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얼마 후 맹열은 감사에게 구실을 만들어 짬을 얻고 운봉으로 송흥록을 찾아가 필경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송흥록과 맹열의 부부생활은 결코 평탄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송흥록의 오만한 성격과 맹열의 너무 지나친 시기질투가 서로 배합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송흥록은 진주 관찰사의 부름을 받게 되어 맹열과 왕환 20일을 약속하고 떠났는데, 일이 늦어져서 3일 늦게 운봉으로 돌아와 보니맹열은 가출하고 집에 없었다. 송흥록은 식음을 전폐하고 맹열을 찾아다녔다. 맹열이 진주에 가있다는 소문을 듣고 송흥록이 달려가 보니, 맹열은 뜻밖에도 진주병사 이경하의 수청기생이 되어있던 것이다. 맹열은 송흥록이 약속날짜에 돌아오지 않은 것은 필연코 다른 기생과 정을 통하는 것이라고 곡해한 나머지 가출하여 진주로 와서 자청하여 보란 듯이 이병사의 수청이 된 것이다. 송흥록은 상대가 진주병사인지라 어찌할 수 없었다. 맹열은 송흥록이 진주에 와서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병사를 시켜서 송흥록을 불러 들였다. 이병사는, [네가 명창이라지. 어데 수궁가 중에서 토끼 배가르는 대목을 들어보자, 나를 한번 웃기고 울리면 3백냥의 상을 내릴것이나 만일 그렇지 못하면 너의 목을 베리라]하고, 으름장을 놨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맹열이가 앙심풀이하려고 이병사를 그렇게 시킨 것임을 송흥록은 짐작하였으나 그렇다고 이병사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송흥록은 이병사를 웃기려고 우스꽝스러운 익살, 재담, 해학 등으로 별의별 짓을 하면서 소리를 하건만, 이병사의 얼굴은 얼어붙은 듯이 차갑기만 하였다. 송흥록은 소리를 하다말고 느닷없이 이병사의 앞으로 와락 달려들어 이병사와 얼굴을 맞대고 [ 아이고 아자씨이! 어째서 웃지 않으시오? 날 죽이고 싶소오?]하고, 농담조로 말한 것이 주효하여 이병사는 그만 방긋 웃고 말았다. [우라저씨가 웃으셨는디 또 어떻게 해야 우실까]하고, 송흥록은 토끼 배 가르는 대목을 애원처절한 성음으로, 어떻게나 슬프게 불렀던지 만좌와 함께 이병사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과연 명창이다] 이병사는 탐복하고 3백냥의 상금을 내렸다. 맹열은 이병사에게 송흥록과 전일관계를 솔직하게 고백하였고 이병사의 양해로 두사람은 다시 결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송흥록과 사사건건 맞서는 맹열이는 어느날 [간다]하고 봇짐을 싸가지고 나가 버렸다.송흥록은 맹열을 달래서 다시 화합하고 싶였으면서도 그 자부심이 강하고 오만한 성품은 도리어 맹열에 대한 증오와 격분이 그리고 고독의 비애감이 일시에 병발하고 말았다. 사랑하는 맹열과 영이별하게 됨에 그 비통한 감정은 저 유명한 <진양조> 의 [단장곡(斷腸曲)]으로 나타났으니,

맹열아 잘가거라 맹열아 맹열아 맹열아 맹열아
맹열아 맹열아 잘가거라
네가가면 정마저 가져가지
몸은가고 정만 남으니
쓸쓸한 빈방안에 외로이 애를태우니
병안될소냐 맹열아 잘가거라

이 비창한 소리를 대문 밖에서 듣고 있던 맹열은 동감의 정을 어쩌지 못하고 다시 들어와서 사죄하고 화해하였는데 이것이 부지부각 중에 자탄가를 부른 것이 우연하게도 진양조를 완성하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그후로도 송흥록과 맹열의 불화가 가실 날이 없어, 송흥록은 일찍이 월광선사로부터 [여난의 상이니 여색을 조심하라]는 타이름을 상기하고 맹열과 갈라서고 말았다. 그후로 송흥록은 의정부좌찬성 김병기(1818-1875)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간 것이 철종 10년(1859) 봄이었다. 김병기는 철종의 외척 김씨의 장손으로소 부친 김좌근은 영의정이요 생부 김홍근(김병기는 김홍근의 아들이나, 장자인 김좌근이 아들이 없어 김병기가 김좌근의 양자로 김씨가의 대을 이었음)은 좌의정이며, 김씨일가가 정부요직을 두루 장악하고있어 그 세도는 하늘에 닿았다. 김병기의 벼슬은 비록 좌찬성이나 그는 국사의 중소대사를 막론하고 삼정승 육판서는 상대하지 않고 직접 국왕만을 상대하였다. 철종은 싫건좋건 김병기의 의사를 꺾어나 비우를 건드리지 못하는 옹주였으므로 실제적으로는 김병기가 최고권자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송흥록은 이러한 김병기의 부름을 받고 서울 교동에 있는 김병기 저택의 별관에 부인과 같이 기거하였다. 송흥록은 김병기의 주선으로 어전에서 여러 차례 소리를 하였고, 철종은 송흥록에게 정삼품(正三品)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제수하였는데, 명창으로서 임금의 총애를 받고 벼슬을 제수받은 것은 모흥갑이 헌종에게 종이품의 동지벼슬이 처음이고 송흥록이 두 번째가 된다. 송흥록은 그 전륜의 기예를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그 명성은 서울은 물론 삼천리 방방곡곡에 진동하였다. 벼슬아치 앙반들의 부름에 응하여 소리를 하게 되면 그 행하(보수)는 천량금이어서, 상경한 지 2년만에 수만금을 벌었다고 한다. 철종 13년(1863) 봄 평소에도 김병기는 종친 흥선군을 미워하였는데, 철종이 병약하고 사자가 없게 되자 김병기는 더욱 흥선군을 학대 구박하였다. 원래 성품이 곧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송흥록인지라, 김병기의 체면 없는 처사를 비방하고 [세불십년이라]하고 야유하며, [종친박대는 신자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흥선군을 두둔하고 간하다가 김병기의 노염을 사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송흥록은 함경도로 귀양가게 되었던 것이다. 송흥록은 통정대부의 교지와 그 많은 돈을 그대로 놔두고 부인과 함께 함경도를 향하여 방랑길에 올랐다. 그해 12월, 철종이 사자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니 흥선군의 열 두 살난 둘째 아들이 등극하여 고종임금이 되었고, 생부인 흥선이 이조사상 살아있는 최초이자 마지막인 대원군이 되어서 섭정함에 따라 외척김씨는 일시에 몰락하고 세상이 뒤바뀌고 만 것이다. 이듬해(1864) 흥선대원군은 전날의 송흥록의 은혜를 생각하고 함경 감사에게 사신을 보내어 송흥록을 찾도록 분부하였으나 송흥록이 북청에서 증발하여 버린 뒤였다. 이리하여 송흥록은 일점혈육도 남기지 못하였고, 동생 송광록과 박만순에게 소리를 남겼을 뿐이다.

명창 송 광 록

송광록은 가왕 송흥록의 친동생으로 1803년 전북 남원 운봉에서 송씨가문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송광록은 형 송흥록의 수행고수였다. 당시만해도 명창과 고수와의 차별대우가 몹시 심하였던 모양이다. 송흥록은 부름을 받고 어디를 가든지 가마 아니면 먼곳은 나귀를 타고 가는데 고수인 송광록은 북을 걸머지고 걸어가야 했다. 앉은 좌석도 송흥록은 상좌인데 송광록은 말석이었고, 음식상을 받아도 송흥록은 주인과 마주앉아 산해진미인데 송광록은 말석이나 하인들 틈에 끼여 초라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놀음이 끝 나고 행하를 받을때도 송광록은 송흥록의 10분의 1밖에 받지 못하였다. 이렇듯 명창은 최고의 대우를 하면서 고수는 천대를 받게되니, 아무리 형제간이라도 마음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아니 형제간인 까닭에 더 창피하고 아니꼬운 감정은 오히려 더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송광록은 뇌꼴스러워서 고수 노릇에 불만을 품고 있는데다가, 경상감사 수청기생 맹열이가 송흥록을 찾아와 동거하면서 날마다 부부싸움으로 가정불화가 잦게되자, 참다못한 송광록은 가족들에게 말 한마디 없이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송광록은 그 길로 멀리 제주도 한라산으로 들어가 거기서 만리창해를 집어삼킬 기세로 소리를 연마하였다. 오랫동안 송흥록의 창법과 더늠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불과 5년의 독공으로 득음대성하였던 것이다.

명창 송 우 룡

전남 구례 출생으로 아명은 우렁이다.
명창 광록(光祿)의 아들이며 만갑(萬甲)의 아버지이다.
동문인 박만순과 함께 동편제의 법통을 이어받아 철종고종 연간에 활약하였다.
판소리중 수궁가를 잘 불렀고 특히 베가르는 대목에 뛰어났다. 더늠으로 토끼가 용왕을 속이는 대목이 전해진다.

명창 송 만 갑

명창 송만갑

송만갑은 1865년 전남 구례 봉북리에서 태어났다. 가왕 송흥록의 동생인 송광록의 손자로 그의 부친은 명창 송우룡이니 3대를 잇는 명문의 자손이다. 7세 때 부친의 지도를 받아 소리 공부를 하였는데, 천재적인 소질이 있어 13세때 벌써 소년 명창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송만갑은 시대적 요구에 순응하여 창조와 제작을 가문의 전통적 법제로 답습하지 않고, 일종의 특색있는 제작으로 문호(門戶)를 따로 세웠다. 이 때문에 그의 부친은 [송씨 가문의 법통을 말살하려는 패려 자식이라] 하여, 송만갑을 독살하 려고 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자가의 법제를 밟지 않고 일종 특색의 조격(調格)을 창시 하여 일가를 완성한 만큼, 특징과 이채를 띠었으므로 송만갑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맑은 통상성으로 냅다 질러 떨어뜨리는 성조는 과연 선대인들의 미답지를 개척하였음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고법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방향을 찾아내는 것은 예술가의 본색인 동시에 시대적 요구에 적응한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추세의 응변이라고 한다면 괴이할 것도 없겠으나 곡조의 변화가 그리 없고 아니리가 부족하며, 일구일절에 너무 힘을 씀으로 전체를 통괄하여 가는데 빠진 것이 없지 못한 것이 옥의 티라고 하겠다. 송만갑은 전라감사 이재각에게 참봉직을 받았으며, 1800년대 말 상경하여 고종으로부터 사헌부의 정육품(正六品) 벼슬인 감찰을 제수받았다. 1902년 원각사 시절에 부주석으로 있으면서 주석 김창환을 보좌하며 창극운동을 전개하였고, 원각사 패쇄 후 궁내부 별순검의 실직을 거행하다가 해임된 후 1908년에 협률사를 조직하여 향곡을 순회공연 하였는데, 1910년 8월 한일합방으로 인하여 통영 협률사를 해산하고 고향인 구례로 돌아갔다.

송만갑은 수년간 고향에서 근신하다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시 상경하여 서울 낙원동 속칭 한양골에 세워진 연흥사에서 이동백 김창룡과 그의 문도인 김광순, 장판개, 배설향등과 협률사를 조직하여 판소리와 창극을 연행하였다. 그 후 송만갑은 연흥사를 그만두고 진용을 보강하여 지방 순회를 하였는데 이 협률사가 남원군 수지면 호곡리 홈실에서 흥행한 바 있었고, 후일의 여류 명창 이화중선이 촌부로 살다가 협률사를 구경하고 결심하여 가출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1933년 이동백 김창룡 정정열 등과 제휘하고 제자 인재를 규합하여 조선성악연구회를 설립하고, 후배양성과 아울러 창극의 정립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제자중에는 김광순 장판개 김정문 박봉래 박록주 박초월 김초향 이화중선 김소희 등 남녀 명창 이 배출되었고, 한바탕 소리가 아니라도 그가 직접 간접으로 가르친 제자의 수효는 무려 수백명에 달하였다. 월사금 없이 가르친 제자가 절반 이상이고, 친지의 딱한 사정을 보면 입은 옷이라도 벗어주는 인정과 의협심 때문에 그는 더한층 제자들과 뭇사람의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939년 1월 1일 송만갑은 조선성악연구회 안방에서 74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는데 그이 슬하에 2남, 손자가 7명이나 되어도 대를 잇지 않아서 송씨 계통은 송만갑으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송만갑의 특장은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였다. 송만갑의 말에 의하면 중년에 상처한 후로 [심봉사가 곽씨 부인을 잃고 심청이를 안고 다니면서 젖을 얻어 먹여 키우는 대목에 이르면, 그것이 마치 자기 자신의 환경을 말하는 것 같아 목이 메어 소리를 할 수가 없어서 심청가 대신으로 웃음 장면이 많은 흥부가를 불렀다.]고 술회하였다. 어찌하였든 송만갑은 창악계의 대들보였고 그의 창악계에 대한 공로는 국악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명창 박 초 월

명창 박 초 월

본명 (三順) 1916. 9. 17 - 1983. 11. 26 박초월은 남사당패의 일원이었던 아버지 박덕삼의 3남 10녀중 한사람으로 태어났다고 전한다. 박초월 선생의 출생지를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 남원 운봉 비전리에 생존해 살고있는 친조카의 말에 의하면 [박초월 집안은 잠시 남원 아영면에 머물렀던 것 이외에는 대대로 운봉에서 살았다 한다. 출생지가 순천으로 기록된 것은 선생의 부친과 모친과의 부부싸움으로 인해 잠시 선생이 어머니 따라 순천에 머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순천태생이라고 한것같다.] 이하생략.아무튼 박초월은 판소리의 텃밭이었던 이 고을에서 성장한 덕분에 일찌감치 소리와 접할 수 있었다. 운봉 비전마을은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맞아 싸워 크게 이긴 곳으로 황산대첩비가 있고, 특히 판소리를 집대성한 가왕 송흥록이 살았던 마을이다. 초월은 어려서부터 소녀명창으로 인근 고을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는데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기로 결심하면서 사사하게된 스승은 김정문 명창이다. 김정문은 송만갑의 수제자로, 김정문에게 흥보가 한바탕을 사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소리의 길로 입문하게 된다. 이때부터 소리에 완전히 매료된 초월은 유성준 명창에게 수궁가를 배운 후 16세에 상경해 조선성악연구회의 송만갑 명창에게서 매서운 소리 수업을 받던중, 1930년 전주 전국남녀 명창대회에 참가하여 열일곱의 나이로 일등을 한다. 이때 오케, 폴리돌, 빅타 등 당시의 대표적인 레코드사들과 전속 계약을 맺고 음반도 취입한다. 그후 10여년간 송만갑 명창에게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등을 배웠다.

임 방울, 정광수에게도 소리를 받은 초월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좋은 목소리에 성량도 풍부하여 일찍부터 이름을 떨쳤다. 초월이 특히 잘 불렀던 심청가와 춘향가는 이때 배운 소리로, 박초월은 이 무렵 물산박람회에서 주최하는 명창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한다. 기량을 인정받은 초월은 이때부터 창극활동에 뛰어들게 되는데, 초월은 임방울, 박귀희 명창과 함께 동일창극단의 멤버가 되어 전국을 일주하기도 한다.

이때 초월과 박귀희, 김소희가 함께 출연한 창극은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 춘향전으로 박귀희가 이도령 역을 김소희가 춘향 역을 박초월이 월매역을 맡아서 출연한 창극 춘향전은 장안에 화제가 될 정도로 대히트를 쳤다한다. 8. 15해방이 된후 초월은 박귀희, 김소희와 함께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하는데, 그중 햇님달님 이란 작품은 창극사에 족적을 남길정도로 대인기였다. 해방이 되고 창극활동이 한때 시들해지면서 창극단체가 해산되자 박초월은 서울을 등지고 지방을 돌며 제자를 양성하던 중 1955년에 박귀희, 김소희의 연락을 받고 상경, 한국민속예술학원(현 서울국악예술고)설립에 온 힘을 쏟는다. 이후 이사장직을 맡으면서 학교를 본궤도에 올려놓는데 큰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박초월이 국악사에 끼친 공로가 적지 않은데, 1964년 서울의 몇몇 창악인의 주도로 하한담이나 조선달 등 후사가 없는 선대명창의 위령제를 열어주는 뜻있는 일이 시작됐으나 차츰 국악인들은 이일을 그냥 지나치고 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초월은 1966년부터 156위의 신주를 집에다 모셔놓고 매년 제사를 지내는 정성을 보인다. 이에 후배와 제자들에게 좋은 귀감이 됨은 물론 주위의 칭송도 자자했었다. 1964년 10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의 보유자를 지정 받았고, 1973년 11월에는 [수궁가]의 보유자로도 지정을 받았다. 장기는 춘향가와 심청가이나 수궁가중 범피중류 대목과 토끼수궁에서 나오는 대목을 잘 불렀고, 발림도 좋고 노래 또한 절창이었던 까닭에 당대의 최고 인기를 누렸단다.박초월은 본인의 기량 뿐만 아니라 명인명창이 많이 배출된 가계로도 유명하고, 특히 남원국악에 끼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조통달 명창이 초월의 조카이자 수양아들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서울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남원에서 제자양성에 힘쓰고 있는 민속악의 거장이자 대금의 명인인 서용석은 초월의 언니인 박점례의 아들이다. 또 조카 서용석의 아들이자, 박초월의 조카 손자되는 서영호(아쟁)와 서영훈(피리)은 남원시립국악단에서 그 몫을 다해내고 있기도 하다. 이뿐만 아니라 현재 남원 국립민속국악원의 지도위원으로 있는 박천택(예명 동현)은 초월의 남동생 박수룡의 아들로 대금 연주활동은 물론 후배지도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이렇듯 초월의 집안은 국악의 본향인 이 고장 남원 국악발전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박초월의 성음을 흔히들 대통 속에서 나오는 성음으로 일컬을 정도로 뱃심으로 밀어 나오는 깊은 소리는 판소리의 특징인 수리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연유로 초월은 진양 설움 조를 장기로 할 정도였는데, 춘향가중 춘향모 비는 대목이나 이별가가 특기였다고 한다. 또한 낮은 소리를 낼 때도 특이한 장기로 여겨질 만큼 음역이 매우 넓었던 초월은 노래 솜씨뿐 아니라 연기력도 뛰어났는데 청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특히 추월강산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다.

제자로 조통달, 최난수, 김수연 명창등이 선생의 소리를 잇고 있다. 1979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는 등 바쁜 여생을 보내다 1983년 11월 26일 많은 국악인과 팬들의 오열 속에 운명하였으며 경기도 양주군 신세계공원묘지에서 2000. 8. 28 운봉읍 가산리 산1-12번지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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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06월27일